무정의 집과 미연의 집 사이에서 벌어진 부실 공사가 무정의 반지하 천공으로 귀결된 것이 시작이었다. 미흡한 뒤처리로 방치된 천장의 작은 네모, 사각틀 뚫림 너머로 보이는 몇 개의 파이프 위 또 하나의 천장, 아마도 미연의 바닥이 될 어떤 구멍을 올려다보며 무정은 그것이 자신의 이름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풍경에 대해 뭐라할 것 없다.
이미 풍경이 스스로에게 욕지기를 내뱉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시작점에 서 있는 법을 아나요? 명예 서양인들은 알았던 것 같거든요. 명예 동양인들도 시작과 끝에 대해 알았겠지만, 시작과 끝을 음양의 순환 또는 공존으로 직관하곤 했어서요. 특정 점에 대한 확신을 정립하고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느낌은 딱히 아니었습니다. 명예 서양인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시작점에 서 있는 최적의 방법을 연구하는 데에 할애했습니다. 그들의 기립술은 개척, 침략, 건설, 진보와 같은 거시적 맥락을 횡단할 뿐아니라 텍스트의 구획화, 독자의 시각적 길잡이 형태의 산물로서 문서에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문서의 얼굴이 출발하는 지점을 무대화한 것이 그들입니다.
Initial, 장의 첫 글자가 이후의 글자들보다 큰 존재감을 드러내는 문자 표기법이다. 이니셜은 대개 첫 글자를 붉은 잉크로 구분하는 ‘주서형(rubricated)’ 기법, 역사나 성서, 신화적 사건이나 인물을 그려넣는 ‘서사형(historiated)’ 기법, 서사와 무관한 형상이 문자 내부에 거주하는 ‘서식형(inhabited)’ 기법 등으로 세분화 된다. 그리고 무정은 그 장식들과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들은 너무 붉거나 너무 확연하다.
하지만 무정은 파이프가 내려다보는 네모 안에 거주한 채 자신의 이니셜을 올려다보며 확실히 어떠한 얼굴을 하고 있다. 미연은 죽었다 깨어나도 무정이 보는 풍경을 모를것이다. 무정보다 미연이 먼저 이곳에 왔어야 한다. 무정이 미연보다 먼저 그곳에 살았어야 한다. 아니라면 무정이 먼저 미연의바닥을 뚫었어야 한다.
어쩌면 세계의 시초는 무미의 시작을 알리는 거대한 미음, 생명체의 좌표를 공간과 담판하는 프레임, 확연한 공허일지 모른다.
그로부터 너무 긴 시간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