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바깥은 우리 발 밑에 있다.
홍우인 개인전 《Gutter》, 유영공간, 서울, 대한민국, 2026
글. 신승민

보통 강을 볼 때 우리는 오로지 강만 본다. 마치 그것이 전부인 양, 그런 풍경으로 꼼짝없이 주어진 것처럼. 예를 들어, 서울의 열차가 양화대교를 지날 때 펼쳐지는 바깥의 풍경이 있다. 풍경은 늘 저마다 다른 조건으로 접혀 있고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혹은 특정 순간에 자신도 의도치 않게, 풍경을 펼친다. 하지만 아무리 우리가 풍경을 직접 펼친다고 해도, 만일 보는 이가 관습이나 관성을 따라 풍경을 펼친다면, 그 결과로 주어지는 이미지는 서로 닮아 정형화된 모습을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로 인해 간혹 우리는 익숙한 풍경 앞에서 막연한 무미건조함이나 공허를 느낀다.

그렇게 창밖의 한강을 향해 승객들이 보내는 시선은 자주 닮아 있었다. 특히 노을이 지는 시간과 지하철 기장이 안내방송으로 들려주는 위안의 메시지까지 겹치면 한강은 하나의 이미지로 완성된다. 이토록 익숙한 이미지, 게다가 더는 파헤칠 구석이 없어 보이는 강의 이미지 앞에 선 작가는 보이지 않는 것들, 정확히는 안정된 풍경에 가려진 거대한 구조를 탐색한다. 서울 전체를 가로지르는 강,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고 운영하기 위해 마련된 행정 장치와 시스템의 존재. 이 시스템은 이상하리만치 우리의 지각에서 소거되고, 사유의 맹점을 벗어나지 못하는 듯하다.

사유의 맹점, 즉 도시의 가장자리에서 유통되거나 걸러지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River Film>의 건조한 나레이션은 결과로서의 한강, 우리가 소비하는 이미지로서의 한강이 어떤 조건 하에서 생성되고 보존되는지를 서술한다. 보통 이런 서술은 다큐멘터리적인 목적으로 보는 이에게 명료히 전달되기 마련이지만, 작가의 목적은 이와 다르다. 음성 텍스트는 그것이 문자 그대로 의미하는 바를 종종 이탈하거나 뒤집으며,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 자체가 아닌 그 이면을 드러낸다. 또한, 텍스트는 강과 풍경의 원리를 자세히 설명하지만 체계적이거나 정합적인 앎을 조직하지 못한다. 만일 ‘못’함이 아니라 하지 ‘않음’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면, 텍스트는 대상의 “그 이면”에 자리한 도달 불가능성을 지각하게 하는 장치로 작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반대로, 이미지는 텍스트의 자리를 애초에 고려하지 않은 듯 완고한 자세를 유지한다. 강 주변의 다양한 구조물들을 정적인 롱테이크로 담은 영상은 풍경 이하의 풍경을 기록하는데, 이 풍경은 표정이 없어서 언어로 풀어내기 까다롭다. 그렇기에 텍스트는 풍경을 성공적으로 보완하거나 해설하는 일에 실패하고 빗나간다. 때로 연결되는 듯하나 그것마저 다시 멀어지기 위한 일시적 충돌로 다가온다. 마치 한강으로 흘러들거나 그로부터 빠져나오는 물의 흐름처럼, 텍스트는 넘치는 정보를 가지고 다가왔다가 일종의 절망과 빈곤을 가지고 돌아가기를 반복한다.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텍스트가 의미로 전달되길 멈추고 안개처럼 소음으로 깔리는 순간, 풍요로워 보이지 않던 풍경에서 예기치 못한 사건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렌즈 가까이로 초점 없이 떨어지는 낙엽들. 초라한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의 운동들, 구름과 물결의 이동 등이 장면의 유일한 주체로 재발견되는 순간들이 있다.

정제되어 있고, 자신의 욕망을 홀로 실현할 수 없는 텍스트의 리듬, 필연에 따라 움직이는 듯하지만 우연의 침범을 통제할 수 없는 이미지의 리듬. 두 리듬의 만남과 갈등에서 낯선 음악이 탄생하며, 이때 <River Film>은 익숙한 풍경의 표면을 벗겨내어 다른 층위의 이미지를 출현시킨다. 이 이미지는 1차적으로 모니터로부터 송출, 혹은 ‘방류’되지만, 이를 온전히 지각하기 위해서는 모니터 앞의 편광필름을 거쳐야 한다. 특정 방향의 빛만을 허용하는 편광필름은, 도시 풍경의 청결한 외관을 조건짓는 하수, 정수 처리 필터와 유사한 역할을 맡는다. 이는 도시 풍경의 작동 원리를 시각적으로 구체화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원리와 논리를 역전시킨다. 왜냐하면 본래 정상 풍경을 유지하는 구조는 소위 미관을 해치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모습을 감춰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려진 운명을 물리적 장치를 통해 불러 세움으로써 풍경과 구조를 아우르는 새로운 이중 구조가 나타난다. 이때 우리는 풍경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중첩된 두 항을 동시에 보게 된다. 그리고 풍경 역시, 어쩌면 처음으로, 구조를 마주한다.

흥미로운 것은, 풍경을 접었다 펴는 것은 이곳의 주민인 우리지만, 정작 풍경은 스스로 접은 적도, 펼친 적도 없다는 점이다. 풍경을 조작하는 수리과학적 행정 설계가 도시라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외부의 일이라면, 작가는 이러한 허용과 거부의 논리 필터가 우리 내면에도 존재할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런 맥락에서 감상의 조건이자 방해 장치로 사용된 편광필름을 생각해보면, 그것은 외부(작가)로부터 관객에게 강제적으로 부여된 것인 동시에 우리가 직접 그 앞에 앉음으로써 스스로 떠안는 것이기도 하다.

전시장의 다른 편에 자리한 <링반데룽>은 <River Film>이 드러낸 풍경의 조건을 물질적으로 확장한다. 솟아오른 바닥 아래로 감춰진 배관은 관객의 발밑에서 무엇을 기획하고 결정하고 있는 걸까? 우리는 그 위에 서 있음에도 지하의 내막을 파악할 수 없다. 물질적으로 확장되었음에도 오히려 많은 것들이 구체적으로 감추어진다. 특히 거울 앞에서 어긋난 것처럼 비켜 배치된 두 모니터는 배관 내부를 타고 흐르는 밀폐된 감각을 보여주는데, 이때 분리된 두 영상은 하나의 장면으로 모였다가 다시 둘로 나뉘기를 반복한다. 이처럼 둘과 하나라는 양극이 존재한다면, 두 극 사이를 무수히 오가는, 하나이면서 동시에 둘인 세 번째 극이 존재한다. 모니터 사이의 건널 수 없는 틈을 매개로, 두 영상은 사이로 빨려들어가는 모양으로 만나 세포 융합 같은 장면을 연출한다. 구멍과 구멍이 융합되어 아득한 우주나 흑점, 개기 일식과 같은 바깥의 풍경으로 확장되는가 하면, 때로 안구 표면의 망막을 더듬는 영상이나 파이프 자체의 맨얼굴을 드러내기도 한다.

우리가 접합된 모니터를 분리해서 바라보면, 폐쇄성과 반복 운동이 야기하는 제한된 감각이 발생한다. 시작과 끝의 구분 없이, 방향성의 상실로 인해 생겨나는 무한의 회로. 배관의 세부를 보여줌으로써 보다 선명한 그림을 약속할 것 같지만, 오히려 드러나는 것은 구조를 이해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이다. 그러나 쌍둥이나 다름 없는 두 모니터가, 즉 반사된 동일성이 서로를 향해 미끄러지면서 풍경의 안은 바깥으로 풀려 나오고, 풍경 사이의 틈은 가로막는 방해물이 아닌 새로운 가능성의 조건이 된다. 이때 가청 영역이 제거된 진동 소리는 두 이미지의 확장된 만남을 감싸기 위해 늘어났다가 다시 수축하며 뒤따른다.

방향과 출처를 특정하기 어렵기에 이름이 없는 진동. 단일한 대상으로 규정되지 않는 사물과 우주의 형태로 꿈틀거리며 호흡하는 이미지. 그리고 배관을 아래 숨기며 솟아오른 바닥. 세 가지가 축이 되어 이루는 좌표계. 각 축은 나머지 두 축이 평면에 머물지 않도록 비틀고 회전시켜 차원을 확장한다. 이 확장의 역할은 고정 없이 번갈아 분배된다. 그로 인해 우리가 바라보거나 그것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관점에 따라서 좌표를 차지하는 요소들은 하나의 점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뒤틀린 차원 속에서 점은 얇은 층이 되고, 하나의 층은 항상 여러 겹으로 쌓인다. 이처럼 <링반데룽>은 경험의 요소들을 모호하고 불확정적인 영역, 즉 잠재력이 자유로이 분출되는 우연의 세계로 밀어넣는다.

도시의 배관-시스템은 복잡할지언정 그것이 인간의 손에서 탄생한 것이라면 유한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개인에게 시스템의 크기는 자주 무한한 크기로 다가온다. 그 무한은 개인이나 요소가 전체와 맺는 상대적인 관계에서 발생한다. 개인이 전체의 가장자리, 혹은 그 너머로 향하는 만큼, 전체는 정확히 동일한 거리를 확보해 물러난다. 결국 구조의 가장자리로 나아가는 개인은 자신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고 느낀다. 이것이 작품의 제목이 지시하는 원(Ring)을 반복적으로 따라 움직이는(Wanderung) 순환 운동일 것이다. 하지만 작가가 그리는 닫힌 원은 그 안과 밖을 동시에 만들어낸다. 이런 의미에서 <링반데룽>에 들어선 우리는 안과 밖의 경계에 섬으로써 여러 가능성을 따져볼 수 있는 메타적 위치를 확보하게 된다.

결국 강이라는 풍경의 감각에서 출발한 작가는, 그 감각을 산출하는 복잡한 조건을 경유하여 우리의 이해를 초과하는 영역을 발견한다. 이것은 강이 제시하는 또 다른 아이러니다. 즉, 풍경의 불가능성을 우선 마주했을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바깥의 이미지가 있다.